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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관계

한국의 기와집의 역사와 특징 그리고 해외

by 파란고리 2023. 7. 17.

1. 기와집의 역사


신라시기 건물들은 굉장히 화려한 편이었다. 입식문화를 가지고 있어서 귀족들은 바닥에 타일을 깔기도 했었고 황금으로 기와를 만들어 올린 금입택을 지었다. 또한 경주 월성/동궁과 월지 유적 발굴 결과 처마 끝부분을 하나씩 하나씩 황금장식을 붙였다는 것이 밝혀졌다. 청기와를 올린 집도 있었고 수키와 끝 수막새 위에 황금장식을 올리기도 했으며 나무 골조 부분을 빨갛게 칠하고 그림을 그리기도 했다. 고려청자의 영향으로 청자로 기와를 굽기도 했다. 이 시기에도 황금 기와는 있었고 신라와 별반 다르지 않았다. 유교의 영향으로 기와집들이 많이 검소해졌다. 검은 기와를 올렸고 "사치스럽지는 않되 초라하지 않다."라는 정신으로 서까래와 공포를 알록달록하게 칠했다. 이를 상록하단 단청이라고 부른다. 1970년대 새마을운동 때 낙후의 상징이라며 대대적으로 없앴던 초가집과는 다르게 기와집에 대해서는 별로 터치를 하지 않았지만, 애초에 수량도 많지 않았던 데다가 아무래도 공간의 한계와 소음 문제가 있고, 특수한 경우엔 기와 사이의 틈이 벌어져 물이 새는 경우도 있다 보니 아예 현대식 주택으로 개보수하는 경우도 많이 있었다. 부동산 투기와 재개발로도 사라지는 경우가 많고, 잘 지어지지는 않다 보니 전통 기와집이나 개량형 기와집은 현재는 도심지에서는 찾아보기가 힘들어졌다. 다만, 청와대처럼 지붕만 기와인 서양식 주택은 꽤나 널려 있는 편이다. 1960~80년대에 흔히 지어졌던 양옥 단독주택들도 집 자체는 서양식 벽돌을 이용해 짓되, 지붕은 기와로 장식하고, 온돌도 깐, 일종의 퓨전식 집이 많았다. 하지만 골목골목 다니다 보면 아주 가끔 개발되지 않고 오래된 기와집들이 자주 보이곤 한다. 경주시에는 일부면을 제외한 지역에서 다량의 원조 검은 기와를 볼 수 있다. 경주가 워낙 역사도시인만큼 경주 IC는 고사하고 주유소에도 기와를 얹어놓은 진풍경을 볼 수 있다. 현대에도 기와집을 새로 짓는 경우가 많고 검은색 기와를 올린 집, 파란색 기와를 올린 집, 빨간색 기와를 올린 집들이 많은데 검은색 기와를 올린 집 중에서 아주 가끔씩 기와집 느낌 나도록 흉내만 내려고 하얀 찰흙 위에 기와 얹어놓고 암막새와 수막새로 막아놓지도 않은 집이 있다.

 

2. 기와집의 특징


양반 중에서도 신분이 높은 사람이 거주할 경우 푸른 유약을 발라 만든 청기와를 사용해 지붕을 만들기도 하였다. 전통적으로 부유층이나 양반들만이 기와집을 짓고 살고 있었는데 일반 농민이 기와집을 짓는다 해도 특별한 제재하는 법이 있는 것은 아니었지만, 당시 기와는 상당히 비쌌기 때문에, 지붕을 기와로 얹으려면 품이 많이 들어서 일반 농민들이 짓고 살기에는 도저히 무리였다. 기와 굽는 가마 자체가 손꼽히던 시절이었으니. 그래서 당시에는 기와집이 호화사치주택으로 분류되었다. 물론 양반들이라고 해서 기와집을 막 짓고 살 수 있었던 건 아니고 크기 제한이 있어서 99칸을 넘는 집을 짓고 살 수는 없었다. 99칸이 넘는 기와집은 무조건 궁궐이나 관아, 성균관 같은 대형교육시설이라는 얘기다. 물론 99칸이라고 해도 180평에 해당되는 크기이기 때문에 일반인들 입장에서는 매우 널찍했던 건 마찬가지이며 품이 많이 들었기 때문에 세도가나 전국을 휘어잡는 거상급은 되어야 99 칸집을 짓고 살 수 있었다. 기와집이라고 해서 죄다 넓은 것도 아니라서 한양 도성 내부 같은 도심지 기와집의 경우에는 집이 좁아지는 경향이 있었다. 조선시대 기와집은 전근대시대 세계 모든 문명과 같이 남자와 여자가 생활하는 공간이 구분되어 있었다. 한편으로 일제시기 때 개량형 기와집이 등장하기도 했는데 경성부의 인구가 지방에서 올라오는 인부들로 인해 날이 갈수록 증가하게 되자 새로 집을 지을 땅이 부족해져서 땅값이 오르게 되면서 궁여지책 격으로 기존의 기와집보다 훨씬 좁게 만들면서 2층까지도 만든 개량형 기와집이 등장하게 되었고 현재 서울에 남은 기와집 가운데서 상당수가 이런 개량형 기와집이다.

 

3. 해외


튀르키예 그리스에서는 아직도 전통적인 기와를 덮는 집들이 많이 있다. 이 기와는 현지 점토에 산화철이 다수 포함되어 있기 때문에 보통은 빨간색을 띠며, 기와를 덮는 방식은 한국에 비해 단순한 편으로 한국에서 암키와라고 부르는 평기와만 덮는데, 아랫단은 볼록한 부분이 아래쪽을 향하게 덮고 윗단은 볼록한 부분이 위쪽을 향하게 하고 덮으며 막새는 쓰지 않는다. 일본의 경우 근세시대부터 이렇게 구리로 된 기와를 사용하였는데, 이유는 겨울에 유약을 바르지 않은 흙기와가 물을 흡수하여 동파하는 것을 막기 위해서 사용한 것이다. 다만 현대 금속기와처럼 금속으로 기와를 만들어 지붕에 올리는 간편하고 가벼운 게 아니라, 나무로 지붕을 만든 뒤 최대한 빈틈없이 일일이 사람이 손으로 구리판으로 감싼 것. 보덕암의 구리를 씌운 기둥과 비슷하다. 때문에 품이 많이 들고 복잡한 데다, 구리는 귀한 금속으로 재산이 풍족한 절이나, 권력자들이 사용했다. 일본에서 이걸 처음 쓴 사람이 도쿠가와 이에야스다. 나가야 같은 일본식 전통 가옥이나 중국의 사합원, 토루 베트남식 전통 가옥도 기와를 얹기 때문에 의미 그대로의 기와+으로 불리기도 한다. 구글에 나라 이름+기와집으로 검색하면 많은 이미지 결과를 찾아볼 수 있다. 기와집 자체가 한자문화권에서 흔한 집이다. 전통적으로 서민들은 초가집에서 살았던 한국, 일본, 베트남과 달리 중국에서는 서민층들도 기와집에 사는 경우가 많았다. 이는 화북지역에서 석재자원이 부족했기 때문에 벽돌과 기와제조업이 성행한 영향이었다. 물론 중국이라고 해서 죄다 기와집을 짓고 살았던 것은 아니었고, 지역에 따라 토굴에 살거나 수상가옥에서 사는 식으로 주거형태가 달랐던 면이 강했다.